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기 시대 (문단 편집) === 신석기 시대 === {{{+1 [[新]][[石]][[器]][[時]][[代]] / Neolithic}}}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갈판과 갈돌.jpg|width=100%]]}}}|| || {{{#000000 갈판과 갈돌.}}} || 신석기 시대와 구석기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토기의 등장과 간석기(=마제석기)의 사용, 농경과 정착 생활 여부 등이 있다. 이러한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한 가지만 등장해도 보통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대략 기원전 8000~120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당연히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 사학계는 기원전 4000~3000년경에 한반도에 농경(신석기 혁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1만 년 전에 등장한 [[제주도]] 고산리식 토기가 있긴 하지만, 이 토기는 제주도에서만 한정되었을뿐더러 그 후 몇 천 년 동안에 존재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신석기 시대로 편년해야 할지 논란이 되고 있다. 고산리식 토기의 연대가 과연 10,000년 언저리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상태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한반도 초기 신석기 유적이 수몰되었을 수도 있으나, [[중국]]에서는 후기 구석기 토기가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라 그냥 다 없어졌다라고 하기는 조금 어색한 상황이다.] 농경이 등장하지만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많이 기본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에 속하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 당대의 수렵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기초적인 농경이 슬슬 시작되어 [[조(식물)|조]], [[피(식물)|피]], [[수수]] 등의 잡곡으로 약간의 농경 농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기초적 [[농업]]을 했던 [[대한민국]]과 다르게 예외도 있어서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 아예 농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이 당시에는 관개기술이나 파종법 등 농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 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래도 구석기에 비해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성인병]]과 비만은 신석기혁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과 막집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집]]을 짓기 시작하며, [[성(건축)|성]]이나 [[탑]]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부터 직물이 생산되고, 천옷이 존재했다. 초기 신석기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유적으로는 [[예리코]]가 있다. 최근에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괴베클리 테페]] 같은 종교 목적의 거대 건축물이 등장하고 약 2~3000년 뒤 그 근처에서 최초의 농경지와 도시 유적이 발견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리의 흔적도 이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14,000년 전 빵조각 유물과[[https://cosmosmagazine.com/archaeology/a-bit-stale-by-now-world-s-oldest-bread-discovered/|#]] 1만 2천 년 전 맥주를 발효시기키 위한 절구가 발견되는 등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B%A7%A5%EC%A3%BC-%EC%97%AD%EC%82%AC-5000%EB%85%84-%EC%95%9E%EB%8B%B9%EA%B2%BC%EB%8B%A4/|#]]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괴베클리 테페]]보다 앞서있어, 원래 학설인 '유목민이 정착해 농사를 짓다가 사람들이 모여살고 종교가 등장하고, 농산물을 가지고 요리를 했다.'에서 '유목민이 술과 빵을 빚어먹다가 종교가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폭등하는 술과 빵 소요 때문에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정착민이 되었다.' 라는 인과관계가 바뀐 학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는 각 지역마다 토기를 기준으로 편년이 나뉘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자면, 융기문토기의 전기, 침선문(= [[빗살무늬 토기]])의 중기, 민무늬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 토기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나오지는 않고, 토기 내에서도 다양한 구분과 변형이 존재한다. 흔히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 아는 포탄형의 빗살무늬 토기는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는 토기이다. 그 외의 토기는 대부분 평평한 바닥을 띠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양식의 토기가 존재하며,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문화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시가 되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가 '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다. 농경이 시작되자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여가 시간과 영양 수준이 '''오히려 줄었다'''. 농업 혁명으로 인해 인류 전체의 질적 생산량은 크게 늘었지만 '''사람 개개인의 생활 수준은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현상은 [[산업 혁명]]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 되자, 노동 시간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 듯이 높아졌다.] 현생 인류의 부계 혈통으로 지목되는 'Y 염색체 아담'을 다뤘던 NGC의 Genographic Project 다큐에서도 소개되듯, 7만 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조개]] 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올 정도로, 구석기 시대에조차 인류의 정신 문화는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유물의 질적 수준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 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어버렸다. [[http://kezs.egloos.com/2003585|#]]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정신 문화의 상실'은 잉여 자원과 이로 인한 '재산' 개념의 생성,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시작된 계급사회와 '사치'의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야 원래대로 회복한다. 쉽게 말해 농업 혁명도 산업 혁명 마냥 인류 전체의 여유와 문화를 일시적으로 앗아간 셈인 것이다. 유골의 경우도 채집 시절에는 영양 상태가 좋고 키도 컸지만, 농경 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에 발견되는 유골의 상당수에서는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농업이 불러온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현상의 원인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아무리 조악한들 농사는 농사고 농업과 채집, 수렵의 병행은 인류로 하여금 '정착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전쟁과 약탈 행위가 벌어지고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원시적인 초기의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 변동 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 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 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하는 등 농경사회의 정착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뤄진다. 다만 농경을 시작한 인류가 폭증하는 인구밀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불화들을 감수할 만한 이득은 분명히 있었다. 자연 환경과의 대항에 있어서 사냥/채집 시기의 인류는 잘해봤자 먹이 사슬 중에서 상위에 올라가는 수준의 권력을 지닌 것뿐이었다면, 농경 사회로 인한 인구 증가와 사회 체제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인류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 자연과 대립하면서 독립된 인류 집단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 변화나 급작스러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확률적 안전성, 유전자적 규모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초기 농경사회의 떨어지는 농업 효율과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 강도를 당시의 농경인들이 무엇을 믿고 버텼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곤 했다. 이 부분에서는 2010년대 초 발견된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의 연구 결과가 반대의 결론을 내놓기도 했다. 즉, 농경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이고 나서 생긴 집단이 먹고 살기 위해 농업을 했다는 설. 다시 말해 초기 단계의 농경을 시작한 소수의 신석기인들이 그런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고 농경 초기의 생활 수준 하락을 버텨내 인구를 증가시킨 게 아니라, 일단 사람이 모여서 인구가 늘어나자 뭐라도 먹고 살려고 하다보니 농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이 맞을 경우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것 같이 인류의 상호 주관[* 상상력, 창의력 등에 의해 초월자, 율법, 이념, 평등 같은 실체가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이 인류 발전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예술적 정신 활동의 질적 하락은 숙련 기술이 도입된 농경으로 인한 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잉여 농산물이 집중되는 지배 체제가 구축되고, 구석기인보다도 더 풍부한 자원과 시간을 활용 가능한 소수층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퇴보한 양을 회복했다. 이러한 초잉여 자원 집중에 의한 경제 활동은 구석기 시대의 수준을 넘어서서 현재까지 계속 발달중이다. 간석기, 청동 사용 기술의 체계화로부터 NASA의 우주 개발에 이르는 활동은 수많은 개개 인류에게서 수집된 세금이라는 집중 자본이 점점 성장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유하자면, 산업혁명 초창기 인류는 늘어난 노동 강도와 업무량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잉여 자원(자본)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달]]에 [[닐 암스트롱|사]][[버즈 올드린|람]][[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을]] [[아폴로 11호|보낼 정도로]] 이를 회복하게 된다. [[농업혁명]]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많은 고고학자들의 예측이다. 또한, 언뜻 직접적인 이득이 미미해보이는 농경과 정착생활이라는 인류 생활형태의 변화는, 또 다른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특징과 큰 발전을 결과적으로 이끌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든다는 개념을 넘어서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열처리를 통한 토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 기민하게 이동할 필요성이 있고 소지품을 간소화시켜야 하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 패턴에서는 토기라는 고품질의 용기가 그다지 필요가 없다. 무겁고 파손에 취약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쉽게 벌충이 가능하고 수선과 제작이 쉬운 잎/지푸라기/덩굴 등의 망태, 바구니형의 그릇이 훨씬 더 유용했다. 반면 토기는 물이 새지 않고 썩어 무너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대가로 짊어지고 다닐 만한 무게와 내구성이 아니었다. [[빗살무늬 토기]]의 모양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무언가를 나르는 도구라기보단 거의 거주지에 설치하는 빌트인 주방기구 수준의 형상과 활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도구의 발달은 인류에게 이전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의 테크트리를 열어 주는데, 바로 토기를 구우면서 정교화시킨 불의 제어와, 광물질을 열처리하여 성질을 변화시키고 특성을 끌어올린다는 [[신소재공학]]적 접근법의 실마리를 인류에게 떠올리게 해 준 것. 이전까지 불의 용도가 화염 그 자체의 특성과 물질을 파괴하고 변형한다는 단일 단계로서의 도구로 인식되었다면, 이후 인류의 불에 대한 시선은 열을 발생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달성하는 조절 가능한 도구'로서 제어하고 컨트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다시 말해 '''[[야금술]]이 탄생한 것'''이다. 가까이는 구리의 발견에서부터 청동 등의 합금제련법을 알아내기 위한 기술의 발달, 철을 사용하기 위한 고온 획득의 연구, 이후 유리의 발견 등 수많은 '신소재' 들이 이 때 눈을 뜨게 된 '''물질에 특정한 조건을 가하면 새로운 물질을 얻어낼 수도 있다''' 라는 개념 덕분에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인류의 추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원자]]의 발견 이전에 '적절한 조건과 적절한 원재료가 있다면 어떠한 새로운 물질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라는 희망에 기초하여 연구하던 [[연금술]]이다. 신석기 시대의 끝 무렵에 인류는 [[금속]]을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어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